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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는 정의당 강은미(비례) 의원을 통해 입수한 2018~2020년 재해조사 의견서를 분석했다.
이 문서에는 경기도 산업 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 422명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01
'산재 1번지' 오명 경기도
50대-일용직-떨어짐 '죽음과 가까웠다'
피재자(被災者). 피해자의 오기가 아니다. 재난으로 해를 당한 사람을 의미한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온정의 손길을 보내곤 하지만, 산업재해 피재자에 대한 시선은 상대적으로 싸늘하기만 하다. 일터에서 죽거나 다친 사회적 재난의 피재자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도 말이다.
경기도는 산업재해 피재자가 가장 많은 광역지자체다.
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임종성(광주을)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공받은 지난해 지역별 산업재해 최신 현황 자료를 보면 경기도의 사고재해자 수는 2만4천930명으로 전국 9만2천383명의 27.0%로 집계됐다. 경기도의 사고 사망자 수는 전국 882명 중 235명(26.6%). 산재 사고 사망자 4명 중 1명 이상이 경기도에서 나온 꼴이다.
노동자들의 피로 물든 경기도다. 유명을 달리한 피재자들을 단순히 숫자로만 나열해선 안 될 일이다. 경기도는 17개 광역지자체 중 사업장과 노동자가 가장 많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피재자가 가장 많은 '산업재해 1번지' 오명을 계속 뒤집어쓰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경인일보는 숫자로 남은 산재 사건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 정의당 강은미(비례) 의원실에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2018~2020년 3년간의 재해조사 의견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3년 치 총 1천706건 중 422건에 도내 발생 산업재해 사건이 담겨 있었다.
2018~2020년 경기도 중대재해 사상자수
3년간 재해조사 의견서 분석 결과
'50인 이상 사업장 50대 건설 일용직'
유형별
연령대별
사업장 규모별
업종별
재해조사 의견서는 업무상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거나 노동력을 상실한 피재자들의 산업재해 경위와 원인, 대책을 조사해 기록한 공문서다. 오는 2022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재해조사 의견서를 보다 고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울러 의견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고를 반면교사 삼는 재발방지 대책을 담아야 한다는 게 산업안전 분야의 최신 화두다.
경기도의 재해 조사 의견서 422건이 기록한 업무상 사고 사망자는 422명, 3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산업안전보건법 기준)이거나 사망자와 함께 다친 부상자는 74명으로 총 사상자는 496명이다. 연도별 중대 재해 피재자는 2018년 191명, 2019년 125명, 2020년 180명으로 증감 추세를 꼬집긴 어려웠다.
경기도 재해 피재자의 일반 모델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50인 이하 사업장에서 떨어짐(추락)으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50대 일용직 건설 노동자'다. 재해조사 의견서 분석을 통해 도출해낸 대표적인 중대재해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자.
'50인 이상 사업장 50대 건설 일용직'
철근콘크리트 공사 하청 업체 소속 58세의 철근공은 지난해 12월1일 오후 1시8분 평택시 고덕면의 한 군사시설 신축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숨졌다.
중년의 건설 노동자는 50인 미만의 중소 전문건설업체의 일용직이었다. 시스템 비계 3단 발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벽체 철근 조립 작업을 하다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5.3m 높이에서 토사 바닥으로 떨어져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 끝내 숨졌다.
당시 피재자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대가 없었다. 몸을 지탱해줄 안전 난간은 재해 발생 이후에야 설치됐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한 명의 목숨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재해 방지 시설물을 설치한 것이다.
50세의 일용직 형틀목공은 지난 2019년 5월10일 오전 9시30분 안성시 석정동 아양택지개발지구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 현장에서 숨졌다. 사고 당시 무자격자가 조종한 무인 타워크레인이 그가 서 있던 보 거푸집을 건드렸다. 3.3m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이 노동자도 안전대 없이 일하고 있었다. 이 현장의 산재 역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추락할 위험이 있는 높이 2m 이상의 장소에서는 사업자가 노동자에게 안전대를 착용시켜 추락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보호구보다 노동자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건설 산업 현장이다.
보호망 없이 목숨건 일터… "노동자에게 안전은 기본권" 목청
전체 피재자 496명 중 229명(46.2%)이 떨어짐(추락) 산재다.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무리한 동작'을 하다 재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피재자에게 귀책을 묻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안전이 보장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 추락하는 사업자의 안전 의무 해태를 지적해야 마땅하다.
떨어짐에 이어 화재·폭발이 58명(11.7%)으로 뒤를 이었다. 화재나 폭발은 사고 발생 시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져 피재자 수 집계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피재자의 연령대는 50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그래프를 그렸다. 도내 중대재해 다발 기초지자체의 오명은 화성시가 썼다.
화성시는 피재자가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용인시(49명)와 평택시(30명)가 이었다. 신도시 개발 등 건설 현장이 몰린 지자체에서 중대재해가 자주 발생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31개 시·군 중 최근 3년간 중대재해 청정구역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운영위원)는 "안전보건공단의 슬로건이 '안전은 권리입니다'로 바뀐 지 2년이 지났다. 노동자의 안전보건 권리는 국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역할"이라며 "경기도가 전국에서 사업장과 노동자가 가장 많아 산재 피재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과 태도는 안전은 권리라는 안전보건공단 슬로건과 유리된 발상이다. 일자리가 많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에 그쳐선 안 된다. 노동자에게 안전은 기본권"이라고 말했다.
비극적인 죽음 계속 되는데…
산재 사고 막을 수 없는 경기도
02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지자체
235명. 지난해 경기도에서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숫자다.
2020년 산재 사고 사망자는 모두 882명. 이들 4명 중 1명이 경기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많은 수의 노동자가 경기도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정작 경기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경기도엔 사업장을 근로 감독할 '권한'이 없다.
권한은 전적으로 중앙정부에 있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용노동부와 그 소속 기관에 근로감독관을 둔다'라고 규정한다. 이 지점에서 경기도는 권한 '공유'를 주장하고 있다. 근로 감독 권한을 중앙정부가 독점한 현재 시스템으론 반복되는 산재 사고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사업장을 근로 감독할 권한을 놓고 경기도와 고용노동부, 노동계가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노동현장의 감시·감독 권한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경기지역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
경기도는 사업장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지난 7월1일 기준 근로감독관 총원은 2천421명. 이 중 산재 예방 업무 등을 담당하는 산업안전 근로감독관은 625명이다. 전국 사업장 수는 271만9천308개소로, 감독관 1명이 맡아야 할 사업장 수는 4천350개소나 된다.
이처럼 제한된 인력으론 모든 사업장을 관리할 수 없는 탓에 실제 감독이 이뤄진 사업장은 극소수다.
지난해 산업안전 감독이 진행된 사업장은 모두 2만478개소로, 전체 사업장의 1%에도 채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이재명 지사는 지난 4월 평택항에서 청년 노동자 이선호씨가 사고로 사망하자, "인력과 여력이 충분치 않아 근로감독에 어려움이 있다면 과감하게 업무를 나누고 공유하면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근로기준·산업안전 분야 근로감독관 정·현원 현황
제공/임종성 의원실
고용부 'ILO 협약' 들어 불가 입장
경기도, 중앙 감독하 '공유' 가능 주장
고용노동부는 그러나 경기도의 권한 공유 주장에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5월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근로감독권 공유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부는 경기도의 이런 주장이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은 지난 1992년 ILO 제81호 '근로감독 협약'을 비준했다. 해당 협약 제4조는 '근로감독관은 회원국의 행정 관행에 반하지 아니하는 한 중앙기관의 감독 및 관리하에 두어야 한다'고 한정했다. 근로 감독 업무의 통일성을 보장하려는 취지다.
ILO 협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노동부와 경기도 양측 모두 '중앙기관의 감독 및 관리하에 두어야 한다'는 대원칙에 이견은 없다. 다만, 경기도는 협약 내용처럼 중앙정부 감독 아래 지자체가 근로 감독 권한을 행사하는 건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이다.
동 협약 제5조는 중앙정부가 '그 밖의 정부 기관 및 공공·민간 기관 간의 효과적 협력'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며 그 가능성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이양 대신 '공유'라는 키워드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자체 권한 공유'
노동계까지 반대
법 개정도 '지지부진'
경기도 노동안전지킴이 고양지부 소속 박현철씨와 취재진이 고양시 덕양구 지축지구의 한 다세대주택 근린생활시설 신축 현장의 현장대리인과 함께 안전위해 요소를 점검하고 있다.
경기도의 권한 공유 요구는 노동계의 반대에도 직면했다. 이는 지자체가 근로 감독 권한을 행사할 충분한 역량을 가졌느냐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가깝다.
한국노총은 지난 5월 '근로감독 기능 지방정부 이양 논의 반대한다'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보려는 의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근로감독권 지자체 이양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측은 지자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근로 감독 기준, 감독 기관이 이원화되면서 불거질 비효율성, 조사의 공정성과 전문성 등을 문제 삼았다.
경기도는 식품, 의약, 환경, 안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사 권한을 위임받아 '특별사법경찰단'을 운용하고 있는 만큼 노동 영역의 전문성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경기도는 대검찰청이 실시한 '2020년 특별사법경찰 업무 유공 평가'에서 최우수 기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자체 간 편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역량을 갖춘 지자체가 있는 반면, 준비가 부족한 지자체가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노총도 당시 성명서에서 "한마디로 '나는 잘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지자체가 더 많다는 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면서도 산업재해를 막기 위해 지자체의 역할이 늘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뜻을 같이했다.
이상국 숭실대 안전환경융합공학과 겸임교수는 "(근로 감독 권한을) 중앙이 통제하는 방식으로 해서 일부 행정 권한만 지자체에 넘기면 지역사회에 기여 하는 바가 클 것"이라며 "권한이 생긴 행정 기관이 사업장에 가서 지도·점검 등 틈새 역할을 제대로 하면 산재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근로기준법 개정 가능성은
이처럼 경기도와 고용노동부, 노동계 등 근로 감독 권한 공유를 놓고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근로기준법 개정안 처리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더불어민주당 임종성(광주을) 의원과 윤준병(전북 정읍·고창) 의원은 현재 근로 감독 권한을 광역자치단체에 일부 위임할 수 있도록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한 상태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통과 여부를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임종성 의원실 관계자는 "부처에서 이 법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노동부에서는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며 "논의의 테이블로 올라가는 데까지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고 귀띔했다.
경기도는 올 하반기까지 '지방정부 근로감독권한 공유 협력모델 도입 및 효과성 연구' 용역을 진행한다. 전문적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부 설득에 나서기 위함이다.
경기도 노동국 관계자는 "전국적 통일성이 필요한 사항은 중앙정부가 정하고, 노동현장의 감시·감독 권한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공유하도록 근로기준법 개정을 계속 건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근로 감독 중과부적인데… 경기도에 권한 못 준다는 정부
03
남겨진 노동자의 트라우마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항상 불안해
사고가 내 잘못으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날벼락 같은 일로 몸도 아프고 트라우마도 겪으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고 억울해
한 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2019년 1월25일 김포시 고촌읍의 한 공동주택 공사현장. 함바 식당(건설현장에서 운영되는 식당)에서 먹은 밥이 채 소화되기 전이었다.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앞두고 임시 포장된 언덕을 올라가던 레미콘 차량이 4m 아래 거푸집 작업장을 덮쳤다.
현장에서 형틀 목공 작업 중이던 이현재(가명·62)씨 눈앞으로 4t짜리 거푸집이 넘어왔다.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거푸집을 빠져나온 현재씨가 마주한 것은 전도된 레미콘 사이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다리'였다. 커다란 레미콘이 전국 곳곳을 돌며 15년 넘게 함께 일한 두 살 아래 동료 배모씨를 깔아뭉갰다.
"레미콘에 깔려 다리만 보이는데 그때 느낌이, 죽었구나…."
그의 동료는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와 그의 동료는 강원도 영월의 한 건설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잠만 따로 잤지, 같이 밥 먹고 일하고 거의 종일 붙어 있는 친구였어. 현장에서 만났지만, 마음이 잘 맞아 오래 함께 일했지."
동료는 떠났고, 현재씨만 남았다.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사고가 현재씨를 괴롭힌다. 매일 같이 죽은 동료가 나오는 꿈을 꾼다. 수면제를 먹어도 4시간 이상 잠들지 못한다. 그러다 술에 손을 대고, 술 없인 잠들기 어려워졌다. 열흘에 한 번 입안을 점령하는 염증 탓에 밥맛도 잃어 점점 말라 갔다. 80㎏에 가까웠던 몸무게는 62㎏까지 줄었다.
"밑에 깔린 친구 다리만 보였다"
2년 지났지만 아직도 악몽 시달려
9개월만에 '산재 트라우마' 인정
요양급여 끊겨 결국 또 현장으로
"주위에서 '뭐 그런 걸로 그렇게 힘들어 하냐'고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 사람들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정말 몰랐는데 이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싶어."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노임도 없다. '생활고'가 현재씨의 삶에 멍에를 씌웠다. 사고 이후 9개월 만인 2019년 10월에서야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겪은 '산재 트라우마'가 그의 진단명이다.
18개월간의 정부 지원 산재 피재자 요양 급여는 지난해 8월 끊겼다. 먹고 사는 문제가 배운 일이라곤 목공이 전부인 그를 현장으로 밀어냈지만, 이내 못과 망치를 쥔 주먹에 힘이 풀렸다. 몸과 마음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여를 지내다 지난해 11월에서야 어쩔 수 없이 트라우마의 건설현장으로 다시 몸을 담기 시작했다.
"출근 전날 다시 현장에 나간다고 하니까 너무 두렵더라고. 또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고 걱정돼 내리 악몽만 꿨어."
결국 그는 약을 늘렸다.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증상이 '트라우마'인지조차 몰랐던 현재씨는 사고 두 달이 지나서야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병원도 산재 요양급여 신청에 회의적이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아 항상 불안해. 사고가 내 잘못으로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날벼락 같은 일로 몸도 아프고 트라우마도 겪으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고 억울해."
시간 날 때 책을 읽고 삶의 재미를 찾아가던 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누군가에겐 소소한 일상이 산재 트라우마 나락에 떨어진 현재씨에겐 고행이 됐다.
트라우마는 초기 발병했을 때
개입해서 심리적 상담을 해줘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만성적인 문제가 된다
지난해 6월 문을 연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는 중대재해와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직업적 트라우마를 겪은 노동자들을 위한 상담 활동에 나서고 있다.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를 포함해 경기도 내 직업트라우마센터는 총 5곳.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직접 사고 현장에 나가 노동자들을 만나 노동자들의 일상 회복에 힘쓰고 있다.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 제공
경기·인천 5곳 '직업 트라우마센터'
작년 4곳 689명 찾아 전문심리상담
한국사회가 이현재씨처럼 산업재해 사고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지난해 3월 전국 8곳에 '직업트라우마센터'를 설치했다.
산재 사고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들의 회복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센터는 중대재해뿐만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 등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로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에게 전문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인 지역에는 현재 인천과 부천, 경기 서부, 경기 동부, 경기 북부 등 총 5곳의 센터가 있다. 올해 문을 연 경기 북부를 제외하고 지난해 경인 지역 센터 4곳을 찾은 노동자는 인천 181명, 부천 201명, 경기 서부 148명, 경기 동부 159명 등 총 689명이다.
직업 트라우마 치료는 초기 개입이 중요하지만, '때'를 놓치는 노동자가 아직 많다고 한다. 자신이 산재 사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노동자들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다. 현재씨도 자신의 증상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에서 도움을 받았다.
정혜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장)는 "트라우마는 초기 발병했을 때 (센터가) 개입해서 심리적 상담을 해줘야 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만성적인 문제가 된다"며 "초기에 빨리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면 회복 속도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면서 회복 탄력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정조웅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 상담심리사도 "마음이나 심리적 문제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는 경우가 많고 정확하게 현재 증상이 트라우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적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에서 근무하는 정조웅 상담심리사, 정혜선 센터장, 엄재영 산업전문간호사.
센터는 초기 개입 이후에도 사후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노동자가 안정화가 됐다고 해서 상담을 종료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 상담이 필요하다면 횟수 제한 없이 상담을 진행한다. 병원 치료가 필요하면 병원을 연계해 노동자의 일상 회복을 돕는다.
하지만 노동자의 트라우마 관리는 여전히 '예방사업' 정도로만 치부된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크지 않다는 인식 탓에 투입되는 예산은 제한적이다. 경인 지역에만 트라우마 센터 5곳이 있다곤 하나 인구와 면적을 고려하면 부족한 실정이다. 실제로 부천직업트라우마센터는 부천, 김포, 고양뿐만 아니라 서울 남부권까지 담당하고 있다.
추가적인 센터 건립과 지자체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 센터 관계자는 "경기도가 직접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힘들 수 있겠지만, 우리와 같은 지역 내 센터들이 더 활성화할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계획을 세우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도의회 경제노동위원회 김장일(민·비례) 부위원장은 "산업 현장에서 사고를 겪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겪을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이라며 "조례 등 경기도가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는 노동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아들의 죽음, 남겨진 엄마
김미숙 '김용균 재단' 대표
"자식을 잃고 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픔만 감내하면서 있고 싶었는데, 계속 용균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얘기하더라. 그다음부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나서서 안전하지 못했던 현장 때문에 용균이가 그렇게 된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가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자식도 없는데 이렇게 먹고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용균이와 같은 죽음이 계속된다면 트라우마는 평생 안고 가야 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대책·안전조치만 있어도 살 수 있는 사람 많아"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당시 24세)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2018년 12월 충청남도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벨트에서다. 김용균씨의 몸은 위험한 일터에서 회사의 작업지시를 따르다 부서졌다.
'제2의 김용균을 막아야 한다'며 각종 법안이 발의되고 대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산업재해는 오늘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산업재해 사망 사건은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그늘은 숨진 노동자의 가족과 동료에게도 드리워진다. 매해 산재로 숨지는 노동자는 2천400여명, 이들의 가족과 동료까지 더하면 수만명이 산재로 고통을 받는다.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과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 낸 현실이다.
고(故)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사단법인 '김용균 재단' 대표는 아들을 산재로 떠나보내고 삶의 목적이 사라졌다고 한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김 대표는 산재 사망 사건을 겪고 난 뒤 아들처럼 수많은 사람이 일하다 죽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내 가정을 잘 돌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뒤 사회가 안전하지 않은데, 어떻게 각각의 가정이 안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남았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역리의 아픔은 김 대표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위험한 일터에 내몰려 숨진 아들의 어머니에게 냉혹한 현실이 트라우마를 깊게 했다. 사측은 김용균의 과실로 몰았다. 원청은 쏙 빠진 채 하청에 책임을 떠넘겼다. 숨이 끊어진 아들은 말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아들의 산재 사망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산재 피해 가족모임 '다시는'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김용균 재단의 시작
산업재해 사망이 되풀이되는데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를 마주한 김 대표는 '김용균 재단'을 만들었다. 김 대표는 재단 출범을 앞두고 40여명의 유가족 대책위원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일반 가정주부라서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여러분들이 도와주시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김용균 재단은 지난 2019년 10월26일 출범했다. 계속된 죽음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산재로 인한 죽음이 헛되이 잊히지 않도록 기록하고 싶었다.
김 대표는 산재를 막으려면 제대로 된 처벌이 필요하지만, 시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잠깐의 관심으로 산업재해가 줄어들거나 안전한 노동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는 돌아다니다가 공사현장을 보면 안전조치를 물어보기도 한다. 일반 시민들도 안전하지 않은 공사장을 보면 직접 현장에 다가가 위험해 보인다고 말해주는 연대가 중요하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나서다 보면 큰 흐름이 만들어질 것이다. 안전한 사회는 누군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김 대표의 목표는 재단의 인력을 늘려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는 산재 현장에 손을 뻗는 것이다. 다시는 아들과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